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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몰트만 제자들의 추모 글 모음

未來の未來 2024. 6. 23.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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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몰트만 출생 1926년 4월 8일 독일 함부르크 사망 2024년 6월 3일 독일 튀빙겐

 

세계 신학계의 거성 위르겐 몰트만 교수님 소천하시다!
[기고] ‘희망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
한국신학아카데미 원장 김균진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발췌]

20세기 후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 신학계의 거성이셨던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교수님이 2024년 6월 3일 튀빙언(Tübingen)에서 소천하셨다. 한때 독일 개신교회의 총회장이었던 하인리히 벧포르드-슈트롬(Heinrich Bedford-Strohm) 목사님에 의하면, 몰트만 교수님은 “세계 교회의 위대한 스승”이셨다. 마음속 깊은 슬픔과 함께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 앞으로도 세계 신학계에 그분을 능가하는 학자가 등장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된다.

1926년 4월 8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나신 몰트만 교수님은 1943년 17세 때 독일 공군에 강제 징집되어 복무하다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영국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포로수용소에서 성서를 접하고 신학 공부를 시작한 그는, 석방 후에 부퍼탈(Wuppertal) 신학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여 박사학위를 받으시고 독일 북부 브레먼(Bremen) 지역에서 목회를 하시다 부퍼탈 신학대학의 교리사 교수로 초빙되었다.

1963년 본(Bonn) 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봉직하시다 1967년 튀빙언(Tübingen) 대학 조직신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미국 여러 대학으로부터 교수 초빙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시고 계속 튀빙언 대학에 계시다가 1994년에 은퇴하셨다.

몰트만 교수님의 신학은 한 마디로 “희망의 신학”이라 말할 수 있다. 함부르크 도시 전체가 연합군의 폭격으로 불바다가 되고, 자기 곁에 있던 친구가 파편에 맞아 온몸이 찢기는 참화를 보았던 그는, 파멸과 고난과 죽음 속에서도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기다리고 희망하는 성서의 말씀을 발견하고, 이를 그의 신학의 초석으로 삼았다.

어떤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에 대한 기다림과 희망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있는 세계를 추구해야 한다는 그의 메시지는 세계 신학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카를 바르트(Karl Barth)의 문헌을 넘어서는 그의 수많은 저서들이 한국을 위시한 세계 수많은 나라에서 번역되었다. 어떤 저서는 한국에서 가장 먼저 번역, 출판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학자들이 그의 신학에 관한 논문과 저서를 발표하였다.

몰트만 교수님의 기본 사상은 나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는 어떤 난관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에 대한 기다림과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하며, 이 희망의 빛 속에서 성서를 읽고 해석해야 한다.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 곧 “하나님 나라”가 먼저 우리 자신의 인격과 생활 속에서 체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에 대한 우리의 말은 거짓말이 된다는 것을 나는 몰트만 교수님에게서 배웠다.

내가 체험한 몰트만 교수님은 참으로 인간적인 분이었다. 1971년 본인이 튀빙언 대학에 공부하러 갔던 당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에 속했다. 한국 유학생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독일 교수는 거의 없었다. 유명한 판넨베르크(W. Pannenberg), 윙얼(E. Jüngel) 교수는 세상 떠나기까지 한국 유학생 중 한 명도 박사학위 후보자로 받아주지 않았다.

몰트만 교수님은 예외였다. 그는 나를 박사학위 후보자로 받아주심은 물론, 내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하고, 딸 마리아(Maria Wildermuth)의 결혼 주례를 맡아 주셨다. 1977년 본인이 연세대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는 “난방비(Heizkosten)” 보태 쓰라고 두 번에 걸쳐 수십만 원의 돈을 보내주시기도 하였다. 내가 실수하는 일이 있어도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끝까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이어가셨다.

나의 뒤를 이어 김명용, 이신건, 유석성, 곽혜원, 이성희, 김도훈 등 여러 한국 학생들이 박사학위를 얻도록 지도하셨다. 2021년부터 본인이 원장으로 있는 한국신학아카데미(전 혜암신학연구소)의 명예자문교수가 되어 주시기도 하셨다.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몰트만 교수님의 소천을 맞이하여 이런 생각을 해본다. 몰트만 교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분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다! 위기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바라고 희망하며 그것을 추구하는 일이다. 먼저 우리 자신의 인격이 “새로운 피조물” 곧 “하나님의 모습(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추구하는 일이다! 몰트만 교수님의 이같은 가르침이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

아버지, 할아버지의 소천을 애도하는 몰트만 교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

한국신학아카데미 원장 김균진


"한국교회에도 지혜의 빛 비추던 세계적 신학자"
[ 특별기고 ] 몰트만(J. Moltmann) 교수님을 추모하며
김명용 원장
[한국기독공보 발췌]
온신학(Ohn Theology)을 독일 신학계에 알리면서, 온신학이 세계로 알려지는데 큰 도움을 주시고, 한국에서 몰트만 신학의 영향을 받은 온신학이 탄생해서 발전하는 것에 대해 크게 기뻐하시고, 보람을 느끼셨던 몰트만 교수님이 2024년 6월 3일 독일 튀빙엔(Tubingen)에서 향년 98세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삼가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몰트만 교수님은 한국의 민주화에 큰 공헌을 하셨고, 20세기 후반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 정의와 인종차별 철폐, 민주화 및 평화운동에 신학적으로, 사상적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친 신학자입니다. 1989년 독일의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동서냉전을 종식시킨 유럽의 평화운동의 사상적 최고 지도자는 몰트만 교수님이셨습니다. 세계를 생명과 평화의 세계로 만드셨던 위대한 스승이 세상을 떠나신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오늘날 다시 불어오는 신냉전과 천체주의 국가들의 발흥을 볼 때, 더욱 아쉽고 슬픈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누구에게 가서 세계의 생명과 평화의 길을 물어야 할까요?

몇 해 전 튀빙엔에서 제가 몰트만 교수님께 꼬이고 막히고 위험해진 한국의 평화 통일의 길에 대해 물었을 때, 몰트만 교수님의 답은 "기도하라(Beten)"였습니다. 지금도 그 순간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엄청나게 위험해진 동북 아시아의 평화의 길의 첫째는 기도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몰트만 교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평화의 길을 말씀하기 이전에 먼저 기도를 언급하신 것이었습니다. 몰트만 교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상은 장신대의 대학교육 이념(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 구현)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본 교단의 2003년 반포된 21세기 신앙고백서 제정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몰트만 교수님의 신학사상이 본 교단과 장신대의 방향에 큰 빛을 비춘 것입니다.

몰트만 교수님은 세계의 신학을 바꾸고 세계를 변화시킨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20세기 후반부터 세상을 떠나신 날까지 세계 최고의 신학 스승이었습니다. 1964년 '희망의 신학(Theologie der Hoffnung)'을 출간하면서 개인주의적이고 실존주의적인 신학을 무너뜨리고, 역사책임적이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신학의 중요성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희망의 신학'은 7500만 명이나 죽은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배경으로 등장한 저술이었습니다. 몰트만 교수님은 3년 간의 전쟁포로 생활을 겪으며 역사 안에 존재하는 깊은 악을 발견했고, 하나님 나라의 평화가 역사 위에 강림해야 함을 절실히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WCC가 20세기 후반 세계교회의 과제로 정의(Justice), 평화(Peace), 창조 세계의 보전(Integrity of Creation)의 중요성을 선포했을 때, 그 배후에는 몰트만의 신학이 있었습니다.

몰트만의 신학은 민중신학과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고, 한국의 순복음교회와 조용기 목사님이 개인주의적인 구원론에서 벗어나서 정의와 평화와 창조의 보전이라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신학에 가슴을 열게 하는데도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몰트만 교수님은 9명(김균진, 이성희, 김명용, 박종화, 배경식, 김도훈, 이신건, 유석성, 곽미숙)의 박사 학위 한국인 제자들을 길러내었을 뿐만 아니라, 이종성 박사, 박봉랑 박사, 안병무 박사, 서광선 박사 등 수많은 한국인 친구 신학자들이 있었고, 몰트만의 신학을 사랑하는 헤아릴 수 없는 수 많은 한국인 신학도를 만들어 낸 분으로, 최근 50년 간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신학자입니다. 몰트만 교수님은 지난 50년 간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너무나 큰 스승이었습니다.

몰트만 교수님은 민중신학자들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지원을 아끼지 아니 하셨지만, '민중이 예수다'와 같은 신학적 오류에 대해서는 정확히 지적하시며 한국 신학의 바른 길을 위한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몰트만 교수님은 세계를 구원하시는 분은 민중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을 정확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몰트만 교수님의 서거는 지난 50년 간 한국교회와 신학계의 큰 스승이 떠나시는 큰 아픔을 느끼게 합니다.

주님께서 몰트만 교수님의 수고를 기억해주시고 은혜 베푸시고, 이 땅에 남은 가족들에게도 은혜 베푸시길 기원합니다. 몰트만 교수님이 평생 봉직하신 튀빙엔 대학교와 독일교회 위에도, 그리고 몰트만 교수님이 사랑하셨던 한국교회와 신학계에도 주님의 은혜가 늘 함께 하시고, 신학의 바른 길을 걷게 되길 기원합니다. 몰트만 교수님은 죽음의 순간이 부활의 순간이라고 언급하시며 자신의 묘비에 출생일과 사망일을 쓰지 말고, 사망이라는 표현 대신 부활한 날로 적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몰트만 교수님이 이 땅을 떠나셨지만, 천국에서 부활하셔서 영광스런 몸을 갖고, 살아 계실 것으로 믿습니다.
김명용 목사 / 장신대 전총장·온신학아카데미 원장


위르겐 몰트만, 전쟁으로 절망한 인류에게 불굴의 희망 준 신학자
[가신이의 발자취] 스승 위르겐 몰트만을 추모하며
이신건 교수
[한겨레 발췌]
지난 3일 나의 스승 위르겐 몰트만 박사가 세상을 홀연히 떠나셨다. 향년 98. 갑자기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았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라 침착하려고 애쓴다. 그가 배출한 한국인 제자(9명) 중 6번째 제자로서 나는 그로부터 신학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를 나의 스승으로 삼아서 새로운 신학을 깨우치고, 귀국 후에는 10차례 이상 한국을 방문한 그의 강연을 자주 통역하며, 그의 저서 9권을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생애 중 최고의 행운과 기쁨이었다.

그는 20세기 신학의 교부라고 불린 칼 바르트(1886-1968) 이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신학자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던 인류에게 그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꽃을 던졌다. 그의 첫 저서 ‘희망의 신학’(1964)은 에른스트 블로흐의 책 ‘희망 원리’로부터 큰 자극을 받았지만, 기독교 희망의 본질을 신학적으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불후의 명저가 되었다. “무신론 없이는 메시아적 희망도 없다”라고 말한 블로흐가 사회적 유토피아를 철학적으로 입증하려고 했다면, 몰트만은 약속과 부활의 하나님으로부터 희망의 근거와 동력을 입증하려고 노력했고, 그 토대 위에서 현실 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정의와 평화, 생명의 유토피아를 기대했다.

그 뒤에도 그는 세계적 명성과 공감을 남긴 많은 명저를 출간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났고, 이 고난 속에서 인간의 고난과 연대하고 극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그는 불의와 독재에 저항하며 고난을 당하는 세계의 민중들에게 깊은 연대감과 위로를 전했다. 그 뒤 나온 모든 저서에서도 그는 탁월한 이론적 설명을 넘어서 위기에 처한 교회와 세상, 인간과 지구를 위한 실천적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암울한 유신 독재 시절부터 고난을 받는 한국인을 향한 깊은 우정과 연대감을 표했으며, 기복주의, 내세주의, 개인주의, 성장주의, 물질주의에 빠진 한국 교회를 각성하는 충격을 주었고, 종말론적 희망 속에서 세상을 위한 책임 있는 참여를 독려했다.

1975년 한국을 처음 방문한 그는 박봉랑, 안병무, 서남동 교수 등과 신학적 대화를 나눴으며, 한국의 ‘민중신학’을 세계에 널리 알리려고 애썼다. 그는 한국 교회의 활기찬 모습, 정치적 저항과 고난, 한국 기독교인의 영성을 높이 평가했으며, 이를 자신의 신학 안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의 신학은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오순절 신학, 장로교 신학(통전적 신학, 온신학)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나와 그의 만남은 먼저 그의 저서를 통해 이루어졌다. 신학생 시절 읽은 ‘희망의 신학’은 기독교 복음의 본질을 명쾌하고 탁월하게 해명한 책으로서 나의 신학적 사고에 신선한 자극과 강력한 도전을 주었다. 그의 두 번째 명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내게 독일어 공부를 위한 소중한 자료가 되었고, 독일 유학의 꿈을 품게 해 주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독일어 시험을 통과한 후 1984년 나는 몰트만의 자택으로 달려갔다. 독일인으로서 매우 근엄하고 차가울 것이라는 나의 편견은 부드럽고 친절한 그의 환대 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유학 시절 나에게 재정적인 도움도 기꺼이 주셨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그의 책을 최대한 많이 번역하려고 했다. 특히 나는 그의 첫 저서만이 아니라 마지막 저서 ‘나는 영생을 믿는다’(2020)도 번역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그가 남긴 신학적 영향력은 몇 문장으로 요약하기 어렵지만, 그의 모든 저서 속에는 무엇보다 불굴의 희망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96살에 그는 어느 기자와 나눈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새로운 아침 때문에 하나님에게 감사할 때마다 나는 새로움이라는 말에 사로잡힙니다. 새로운 기회, 새로운 생명 그리고 새로운 영, 새 노래를 불러라 (중략) 아침마다 나는 새로운 영을 받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세상과 이별하기 한 해 전에 생일 축하 가족 모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 “나와 함께 생일을 축하하려고 여러분 모두가 오셨으니 기쁩니다. 4월8일에 97살이 된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1943년 내 옆의 친구가 폭탄에 맞아 죽었을 때, 나도 이미 죽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아침마다 내가 여전히 살아 있고 생명의 기쁨과 함께 새로운 날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물론 나는 죽게 될 시간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여 무덤에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시간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리라고 믿습니다. (중략)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 속에서 나의 희망입니다. 나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나는 생일과 같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날의 아침마다 내게 신선한 용기를 줍니다.”

튀빙겐 공동묘지에 묻힌 그의 비석에는 그의 유언처럼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졌을 것이다. “위르겐 몰트만, 1926년 출생하고, 2024년 부활하다.” 절망과 죽음에 처한 인류를 위해, 그리고 날로 파괴되어가는 세상과 지구를 위해 그는 살아 있을 때처럼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꺾이지 않는 희망을 선사할 것이다. 나의 위대한 스승에게 무한한 존경과 깊은 추모를 드린다.

이신건/서울신학대 은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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